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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가있는 아침

황혼이 머문 자리

by 燕 山 2022. 11. 10.

2022.11.4.                      제비산(燕山) 입구 곱게 물든 단풍 길을 산책하며...

 

                                                             

 새벽 편지

                                     - 곽재구 -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 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라일락 꽃 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 편지를 쓰기 위하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연  산

 황혼이 머문 자리 

            송암 김은재

산 허리
황혼이 머문 자리에
나이테 끌어안고
등 굽은 소나무
춘하추동 푸르른 기상은
변하지도 안 했는데
정신없이 달려온
인생행로
세월이 저만치 가도록
나 이만치 오도록
청춘인가 싶더니 중년이요
이순 인가 싶더니
고희 라 하더라
서산에 걸터앉은
황혼의 그림자
허리굽혀
영롱한 햇살을 주워담는다

 

                                   연 산

 

시골 장날

                            김인태

초하룻날은 고향 장날이다
새벽부터 돈 사려 가는 긴 행렬
강물에 머문 달도
기다렸다는 듯이 뒤 따라나선다
푸성귀인 아낙네 치닫는 종종걸음
소망 같은 계산이 숨차다

난전亂廛 따라
잔정이 거나하게 들이켠 막걸리가 엉킨 고함에
부풀어 오르다 푹 꺼진 보자기 같은 시장기가
빗자루 전 앞 돼지국밥집 문턱에
풋고추 된장에 꾹 찍어
질근질근 씹던 입맛도 괜히 바빠.

                                                                                                   https://youtu.be/__-qQlFsUz8 22 장가계

       들  녘

                           - 정채봉          

냉이 한 포기까지

들어찰 것은 다 들어찼구나
네 잎 클로버 한 이파리를

발견했으나 차마 못 따겠구나
지금 이 들녘에서

풀잎 하나라도 축을 낸다면
들의 수평이 기울어질 것이므로

~~~~~~~~~~~~~~~~~~~~~~~~~~~

풀꽃 하나가 빠져도 들판이 기울 것을 염려하는 사람이,

본인이 빠져나가고 난 지상의 수평은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 서둘러 떠났겠는가.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라고

말할 테지만 변명거리가 못된다. 너무나 개인적 이유인 까닭이다.

세상이 기울지 않으려면, 그가 만든 것처럼 맑고

아름다운 '생각의 추(錘)'들이 더 많이 생산돼야 할 것이다.

                                            ..

정채봉 1946~2001

 

그리움

                              김인태

자꾸만 눈이 가는 

우편함에 골목을 열어 둔 채 

마주 앉은 봄 비 두고 지낸 기억들 

하나하나 꺼내어 진종일 닦아내며 

쓸쓸하다 했지 슬퍼도 

아름다웠던 아슴푸레한 시절  

가난한 길 따라 한 때, 

한 때가 지천으로 피어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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