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根谷의 유래
경북 건천 오봉산 여근곡의 계절별 사진
시간의 화살을 천 년 전으로 되돌려 서기 636년. 신라 27대 선덕여왕 5년, 한겨울인데도 개구리 떼가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라는 못에서 사나흘 계속 울어대는 괴이한 일이 발생했다. 신하들이 불길한 흉조라고 수근거리자 선덕여왕은 두 장수를 불러 "지금 당장 서쪽으로 가서 여근곡이라는 곳을 찾으면 그 안에 백제군이 숨어 있을 것이니 반드시 찾아 죽이시오"라고 명령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500여 명의 백제군이 매복해 있어 출동한 신라군은 적군을 포위해 섬멸했다.
승리하고 돌아온 장수와 신하들이 여왕에게 어떻게 적군의 매복을 알게 됐는지 자초지종을 묻자 여왕은 이렇게 답했다. "성난 개구리는 병사의 상(像)이요, 옥문은 곧 여근(女根)이다. 여자는 음(陰)이고 그 빛은 흰데, 흰색은 곧 서쪽을 의미한다. 해서, 서쪽의 여근곡에 적이 있음을 알았다. 또 남근(男根)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기 때문에 적을 쉽게 잡을 줄 알았다." 삼국유사 지기삼사(知幾三事) 편에서 선덕여왕의 뛰어난 예지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소재지
가는길 : 대구스타디움 - 수성IC - 경부고속도로 - 건천IC(좌회전) - 경주시 건천읍 신평리 오봉산
산행코스 : 건천읍 신평리 유학사 - 여근곡샘 - 주능선 삼거리 - 전망대 - 임도(주사암 가는길) - 오봉산(633m) -
마당바위 - 잇단암봉 - 주사암 - 주사골 - 서면 천촌동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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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서 해학 시리즈(니노지산과 鄭萬瑞 )
정만서는 실존 인물이다. 조선조 말엽 병신년(1836)에 태어나서 병신년(1896)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병신같은
세상을 풍자하며 경주시 건천읍 건천 3리 고지 마을에서 살다간 풍류남아다. --------------------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면 선덕여왕의 입을 통해 이런 말이 거침없이 터져 나온다. “성난 남근(자지)이 여근(보지) 속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되어 있어.”라고. 점잖은 여왕이 수많은 신하들 앞에서 이렇게 갈파했다니 그는 배포 한번
큰 사람임에 틀림없었던 모양이다.
기록에 따르면 개구리가 떼를 지어 울어대는 통에 민심(民心)이 동요하자 여왕이,
“내가 전에 옥문곡(玉門谷)이란 골짜기가 있다는 소릴 들었는데, 개구리들의 징조로 보아 백제(百濟) 군사가 그곳에
숨어 있을 것이니 가서 토벌하라.” 하여 작전을 끝낸 다음, 그걸 어찌 미리 알았느냐는 질문에 위에 적은 말을 하더란다.
이 기록에서 김부식(金富軾)은 거기를 점잖게 ‘옥문곡(玉門谷)’이라 적었달 뿐, 기실은 ‘보지산’을
한문으로 고쳐 적은 것에 불과하다.
이 기묘한 형상의 산이 어디쯤 있는고 하니, 바로 입심 좋던 조선조 말의 익살꾼인 정만서(鄭萬瑞)의 ‘안태 고향’에서
서북쪽으로 겨우 7 마장쯤 되는 곳에 있다. 경부 고속도로를 따라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다 보면, 영천(永川)을 지나
다섯 봉우리가 뚜렷하게 솟은 오봉산(五峯山)을 오른쪽으로 만나게 된다. 그 산의 동편 자락을 뚫어 만든 ‘경주터널’을
지나자마자 우측의 경사면에 소녀의 생식기(生殖器)가 반쯤 문을 연 듯한 형국의 골짜기가 있는데, 거기가 바로 옥문곡이다.
그 산의 형상은 너무도 적나라(赤裸裸)하여 차마 쳐다보기가 민망한 모습이지만, 아마도 수많은 세월동안 그 자리에
서 있음직하다. 한때, 경주 부윤(府尹)으로 도임하던 조선조의 목민관(牧民官)은, 그 산의 야릇한 모양을 도임길에
보면 불길하다 하여, 일부러 지름길인 영천(永川)-건천(乾川)-경주(慶州) 길을 피하여 영천(永川)-시티재-남사(南莎)-경주
길로 우회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그런데 독자 여러분, 이 대목이 바로 얼마 전 경부고속철도 노선을 두고 논란이 많았던
경주 도심을 지나는 노선과 건천을 지나는 노선과 일치하는 바, 어쩌면 고속철도를 타고도 여근곡 관광을 하게 될지 모르겠다.
지금도, 가끔 고속도로를 질주하던 차를 세워 둔 채 이 산의 야릇한 자태를 사진기에 담는 사람들이 적지 아니한데,
이러다가는 교통사고의 위험이 따르니 차라리 이 산 아래에다 널찍한 ?전망대?라도 만들어 길손들이 역사의
현장에서 잠시 쉬어가게 함이 마땅할듯 싶다.
남들이야 거기를 ?옥문곡?이라거나 ?여근곡?이라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현지의 초동(樵童)들은 ‘니노지산’이라는 곁말을 쓰니
그건 ‘보’자를 파자하면 ‘노’자 위에 ‘니’자를 포갠 꼴이 되기 때문이다.
봄이면 진달래가 이 니노지산을 처녀의 수줍음인 듯 발그레하게 물들이고, 가을이면 관목 숲에 깃드는 단풍이 불타는 듯
아름다운데, 아무래도 신록이 피어나는 5월초의 풋풋한 모습이 가장 아름다우며, 정면보다는 부운 마을쯤에서
빗겨보는 것이 운치가 높다.
한편 ‘니노지산’의 은밀한 깊은 골짜기에서 사시사철 실개천이 밖으로 흘러, 호기심 많은 더벅머리가 음습한 골짜기에
잠입하여 작대기로 못된 짓을 하여 그만 아랫녘 ‘샙들’마을의 처녀가 바람이 나는 불상사가 발생했단다. 때문에 그 뒤로는
누구도 골짜기에는 근접하지 못하도록 ‘샙들’ 사람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 가까이 가는 게 금기로 되어 내렸고,
그러는 사이 덩굴과 가시나무가 얽혀 지금은 때묻은 인간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일제 시대 때는 여기 아름드리 나무가 장하게 우거져 있어 그 재목에 흑심을 품은 일본 산림주사 녀석이 거드름을 피우며
“그게 다 무식한 조선 사람들의 미신”이라면서 니노지산의 벌목을 시작한지 사흘만에 그만 손발이 뒤틀려 급사했다는 얘기는
현지에서 체집한 실화이다.
그런데 성적인 금기어(禁忌語)를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었던 그때 사회에서, 감히 파렴치(破廉恥)한 상소리를
칡 씹듯이 뱉어온 정만서(鄭萬瑞)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걸죽한 얘기가 전해온다. 이건 아마도 여근곡 부근에 태어나서
이 고장을 기본무대로 걸죽한 얘기만 터뜨려온 정만서와 어떤 개연성(蓋然性)이 있을 성싶다.
아직도 찬바람이 토시짝 속으로 파고들던 어느날, 정만서(鄭萬瑞)는 혼자서 터덜터덜 고개마루를 넘고 있었다.
그때 고개 너머에서 여인의 청승스러운 잡가(雜歌) 소리가 들려왔는데, 가사가 어딘지 정숙하지 못한 듯했다.
아마도 혼자가 아닌지, 간간히 깔깔거리며 조심성 없이 웃는 소리도 들려왔다. 정공(鄭公)이 산마루를 넘어 호젓한
언덕길을 쉬엄쉬엄 내려오자니까 서른 남짓 된 두 아낙네가 비탈진 보리밭을 호미로 매면서 잡가를 흥얼거리다가
뚝 그치는가 싶더니,
“저어, 선비니임, 다리쉼이나 하시며 담배람도 한 대 태우고 가시이소옹(가세용).”
하고 거리낌없이 낯선 남정네에게 말을 붙여오는 것이었다. 아까 들은 잡가의 가사로나 낯선 길손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 태도로 미루어 아마도 과숫댁인 듯 싶은 생각이 들어 정공은 선뜻,
“아아무라머상(아무렴), 까아직꺼, 거랍시더(까짓 것, 그럽시다).”
하고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보리밭둑에 걸터앉아 장죽에 담배를 비벼 넣고, 한 대를 천천히 피워 물었다.
내외법(內外法)이 엄격하던 조선왕조 말이었지만, 장소가 후미진 곳인데다가 상대가 앞가림이 허술한 그런 사람들[과숫댁]
이고 보매, 몇 마디 나누지 않고도 금세 스스럼이 없어지고 말았으니, 그건 정만서(鄭萬瑞)의
말솜씨가 워낙 유머러스한 까닭이었다.
아낙네들은 정공의 별것 아닌 말에도 박장대소를 하며 맞장구를 쳐주었고 이에 신이 난 정공은 내친 김이라 그만,
“그, 이치리(이처럼) 지불어진(기울어진) 비탈밭을 매다 보면 소문(小門) 이 삐이떨어지는(비뚤어지는) 병에 걸리는 수가
더러 있는데...... 내가 사실 그런 병을 자알 보지요만......”
하며 말끝을 흐리자, 걸삼스럽게 생긴 아낙이 슬그머니 소피를 보러 가는 양 잔솔밭 속으로 사라지는가 싶더니, 곧 이어
그쪽에서 은근한 목소리로,
“선비니임! 아이고 우야꼬, 선비님! 참말로 그렇네요. 쫌, 곤챠주이소오, 야(좀 고쳐주세요, 네)?” 하며 소리쳐 왔다.
이 소리를 들은 정만서(鄭萬瑞)는 혼잣소린듯,
“흠흠, 홍합 입서버리가(입술이) 삐이떨어졌시머(비뚤어졌으면) 그거는 천상 가죽침[革質鍼]1)으로 다치리야 되겠구마너
(다스려야 되겠군).....”
하며 핫바지에 묻은 검불을 털며 일어섰고, 홀로 남게 된 다른 과숫댁은 시무룩해진 채 먼산바라기를 하며,
건성으로 호미질에다 또 잡가를 싣기 시작했다.
<도움말: 金月川, 李元柱